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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무 제작과정2_서체,청동,무기,무장

봉황무 2016. 10. 19. 12:54

죽간과 서체

후한 때 채륜(50년?~121년?)이 종이를 개량하기 전까지 기록은 대나무를 잘라 이어붙인‘죽간’에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통일 후 도량형(무게를 재는 방법)을 비롯한 화폐, 마차바퀴간격 등 6국의 상이한 기준을 하나로 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중에 서체도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대전체를 쓰다가 통일진나라 때 이사가 개량반포한 소전체(진전)를 사용하였습니다. 후에 정막이란 관리가 이것을 간략화하여 예서(진예)를 만들었다고 알려졌었는데, 1975년 운몽 수호지 진묘에서 발견된 죽간을 통해 통일 이전부터 예서가 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때문에 극 중 공식문서나 의례에는 전서체를 쓰지만, 패권이 진나라에서 초나라, 한나라로 옮겨지며 예서도 쓰일 예정입니다.

※참고자료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 고대 문화사/사계절/도미야이타루 저/임병덕 역>,<수호지진묘죽간 연구/소명출판/수호지진묘죽간소조(학자그룹) 저/ 윤재석 역><이중텐 중국사/글항아리/이중텐 저/ 김택규 역>



대전=통일 전 진나라 진전=통일 후 진예=정막이 정리하여 건의

죽간


어깨에 소전체배경


철과 청동

철은 녹는점이 1538°C이나, 구리는 1085°C입니다. 때문에 문명사에는 구리를 녹여 주석과 섞는(8:2) 청동이 먼저 등장하지만 구리와 주석은 철에 비해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철은 강도가 센 반면 한계강도를 넘으면 쉽게 깨지고 물과 반응해 녹이습니다. 청동은 철보다 단단하지 않지만 인장강도가 높고(잘 변형되지 않고) 무기로 쓸 만큼 강성을 가지는데다 물에 부식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춘추전국시대에는 철도 쓰였지만(주로 농기구) 청동이 광범위하게 쓰였습니다. 청동은 주조 당시에는 주황색에 가까우나 녹이 슬면 파란색으로 변합니다. 극 중에 나오는 청동기가 검푸른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극과 창

창은 그 목적과 모양에 따라 과戈, 극戟 모矛, 피, 창槍 삭朔 등으로 나뉩니다. 극중에서 진나라는 극을 사용하고 초나라는 모나 창을 사용하는데, 극은 과와 피를 합친 형태의 창으로 전차전을 치뤘던 통일전쟁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것으로 추정되어 두 세력간 전력차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외, 성의 방어에 쓰이는 도구들은 묵자에 서술된 것들입니다.

※참고 <무기와 방어구-중국편/들녘/시노다고이치 저/ 신동기 역><묵자/명문당/김학주 역>


과와 창



과두군

투구는 상나라(B.C 1600년~B.C1046) 때부터 사용했습니다. 진나라(B.C 221 ~ B.C 206)때 제작된 병마용 군대는 투구를 쓰지 않은 모습이어서 의전용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었는데, 투구를 쓰지 않은 병사는 기록에서‘과두군’으로 남아있습니다. 사기 <장의열전>에 보면 “진은 중무장한 군사가 100만이 넘고, 전차는 1000승에 달하며, 기마가 1만 필이 됩니다. 호분의 전사 중 날랜 동작으로 ‘투구도 쓰지 않은 채’ 손으로 턱을 감싸며 창을 휘둘러 적진으로 달려가는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라고 나와있고, 순자 <의병편>에는 “제나라 군대가 기술과 싸움에 능하지만 엄격한 훈련과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무졸이라 불리는 위나라 군대를 당하지 못하고, 3중 갑옷에 12자루 석궁과 50발 화살, 거기에 창과 검을 지니고 투구를 쓴 채 3일분 식량을 지고 하루에 100리를 가는 위나라의 무졸도 진나라 과두군의 상대가 못 된다”고 씁니다.__<제국의 빛과 그늘(장점민 저/김영수 역)>


무장을 줄인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두군의 존재가 설득력이 있는 건, 개인의 전투력보다 다수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진의 운용이 중요했던 고대 전투의 특성때문입니다. 변화무쌍한 작전지시는 깃발과 악기, 곧 북, 피리, 징 등을 통해 신호를 전달했고 시각과 청각에 장애물이 없을 수록 전달이 용이했을 것입니다. 함성과 소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가 때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봉황무>에서는 과감히 투구를 쓰지 않고 전투하는 과두군을 재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역할과 지위에 따라 투구를 쓰기도 하는데, 역사가 오래된 방어구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도 과두군이...